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

출처:구글, 유앤평화기념관

부산의 희망이자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였던 리차드 위트컴 장군을 소개합니다.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사람

리차드 위트컴(Richard Seabury Whitcomb, 1894~1982) 장군은 1894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ROTC출신으로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이후 1953년 한국 전쟁 당시 부산 미2군수기지사령관 부임하며 처음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대화재의 절망에서 희망을 전하다.

1953년 11월 부산대화재. 30,000여명의 이재민을 구한 것은 파란 눈의 위트컴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군수물자를 열어 천막과 먹을 것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미 의회 청문회에 불려 갔으며, “ 전쟁은 총과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 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전쟁은 총과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

병원 건립에 앞장서다

당시 의료 시설의 필요성을 느낀 위트컴 장군은 메리놀병원을 비롯하여 여러 의료기관을 건립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대한미군원조처(AFAK)의 기금을 조달하기 위해 애썼고, 병원 건립을 위하여 각 부대원과 함께 월급의 1%를 헌금하는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Gentleman in Korea

그는 건립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모금 카니발을 한 바 있으며, 이 사실은 미국 ‘라이프’(1954년 10월 25일자)지에 소개되었습니다.

교육에 힘쓰다.

위트컴 장군은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1954년 부산대학교 초대 윤인구 총장은 부산대 건립을 위해 위트컴 장군을 대학으로 초청하여 ‘종’ 모양 설계도를 보여주며 “내 그림을 사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장군은 흔쾌히 수락하고, 한국정부를 설득하여 장전동 부지 50만평을 무상으로 제공받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대학건설비용 25만불을 지불하였습니다. 또한 건축자재를 지원하고, 공병부대로 하여금 진입로와 부지조성 공사를 돕기도 했습니다.

1954년 장군으로 퇴역하고, 한국에 남아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을 역임하면서 한・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묻히다

위트컴 장군은 퇴역 후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부산의 재건과 복구에 혼신을 다하였으며, 고아원을 짓고 후원하는 일로 자신의 여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하여  UN기념공원에 장군으로는 유일하게 안장되어 있습니다.